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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8-29 23:08
세계 백화점의 원조(백화점 왕) 워너메이커의 신앙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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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은 세계의 부자들 표지(조덕영, 김선정 저/ 겨자씨 간)



세계 백화점의 원조(백화점 왕) 워너메이커








  우리 나라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의 자유와 민주와 인권을 위해 애쓴 공로로 대통령 재직 시절 미국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 옥외 광장에서 그곳 렌델 시장으로부터 자유의 메달을 수상한 적이 있습니다.  자유의 메달 수상을 기념하는 만찬이 있었던 장소는 필라델피아 워너메이커 빌딩이었지요. 이 워너메이커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백화점에 가면 우리가 흔히 보는 광고가 눈에 띱니다.  바로 ‘손님은 왕이다. 고객은 항상 옳다’라는 구절입니다.

  오늘날 모든 백화점을 영어로는 ‘디파트먼트 스토어’라고 부르지요.    이 모두가 ‘백화점 왕’이라고 불리는 미국의 워너메이커가 만들어낸 말입니다..

  100년 전 미국 백화점의 왕이었던 워너메이커의 이름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이지요. 




상점 점원에서 백화점 왕으로

 존 워너메이커(1838-1922)는 가난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존이 하던 일은 아버지의 일을 거드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존은 서점을 거쳐 상점의 점원이 되었습니다.

  이 당시 그의 점심은 우유와 빵 한 조각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 때가 겨우 그의 나이 14살이었지요.  그러나 무척 성실했던 워너메이커는 금 새 주인의 눈에 들었습니다. 정직한 성품을 지녔던 존은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솔직하게 물건의 장단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번은 이것을 본 주인이 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 너처럼 팔다가는 돈을 벌 수 없단다. 정직하게 장사해서는 돈을 벌 수 없는 것이야!”

  그러나 워너메이커는 달랐습니다.

  “주인 아저씨! 당장은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정직하게 팔아야지요. 결국 손님은 우리 가게를 다시 찾을 거예요.”

  주인은 워너메이커를 한번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결국 존의 말이 맞았습니다. 정직한 가격과 꼼꼼한 품질 관리로 판매한 워너메이커의 방식은 인정받았고 그 상점은 갈수록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내 눈이 틀림없어. 존은 정말 믿음직한 아이야!”

  워너메이커는 주인의 인정을 받았던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유태인 주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존! 너에게 내 가게를 맡기고 싶구나! 부탁한다.”

  이 유대인 주인은 성실한 워너메이커에게 그의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이것을 발판으로 23세에 남성용 의류 상점을 개설하였지요.  정직과 신용을 바탕으로 그의 상점은 금 새 커졌습니다.
 
  그리고 31세 때인 1869년, 드디어 세계 최초로 거대한 백화점을 세웠습니다.  상호도 존 워너메이커 앤드로 바꾸었습니다. 금 새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신문에는 많은 백화점 광고가 실립니다. 또 백화점에를 가보면 모든 물건들에 가격표가 붙어있지요.    100 여년 전에는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이런 광고와 경영 비법을 워너메이커는 시도했던 것입니다.

  1896년, 드디어 워너메이커는 뉴욕으로 진출하여 브로드웨이에 거대한 워너메이커 백화점을 세웠습니다. 워너메이커의 백화점은 뉴욕 최초의 백화점이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워너메이커의 성공 뒤에는 하나님을 믿는 그의 신앙이 있습니다.




장관직은 부업, 주일학교 교사는 본업

  존이 13세 소년이었던 시절입니다. 당시 그는 벽돌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였습니다.  당시 교회를 열심히 다니던 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교회로 통하는 길이었지요.  그 길은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창길이 되어 몹시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모두 팔짱을 끼고 아무도 길을 고쳐보려고 나서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직접 이 일을 해야겠다.’

  어린 존은 결심을 했습니다. 존은 자기가 받던 하루 임금 중에서 7센트(약 1천원)를 떼었습니다. 그리고는 날마다 벽돌 한 장씩을 자기 공장에서 사 가지고는 교회로 가는 길에 깔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교회로 들어가는 그 길고 넓은 길을 존 혼자서 완성하려면 2년이 걸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저기 존을 보십시오. 저 아이가 매일 저렇게 교회로 가는 길에 벽돌을 친히 깔고 있어요!”

  교회의 교인들은 크게 반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부끄럽군요. 우리가 너무 게으르고 인색했어요!”

  “그렇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낡은 교회당 건물까지 다시 건축합시다.”

  존이 벽돌을 깔기 시작한지 겨우 1개월 만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그의 신앙은 성공한 뒤에도 여전히 계속되었지요!  워너메이커가 성공한 후 한 기자가 그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워너메이커 씨, 당신은 어떻게 이런 훌륭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으며, 누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내 인생의 모든 것을 유년 시절에 거의 다 배웠습니다. 교회 주일학교가 저의 교육장이었어요. 주일학교 선생님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존 워너메이커는 1858년 베다니 일요학교를 설립하였고, 1864년 미국 최초의 위생박람회를 열었습니다. 기독교 와이 엠 씨 에이(YMCA)운동을 주재하면서 필라델피아의 YMCA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인도에 YMCA를 설립한 것도 워너메이커였지요. 그는 미국과 전 세계에 YMCA 건물을 수 없이 많이 지어주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업적을 남긴 1903년 시작된 한국의 황성기독교청년회(주: 이것이 한국의 YMCA임)의 종로 2가 회관의 벽돌도 1907년 미국의 워너메이커가 기증한 것으로 건축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한국의 기독교도 워너메이커에게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워너메이커는 유명한 선교사요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아더 피어선 박사와도 아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한국의 평택대학교(구 피어선 신학대학)는 1912년 피어선 박사의 귀중한 성금으로 시작된 대학입니다. 선교사는 성도들의 귀중한 헌금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분들입니다. 아마 피어선 박사의 성금 중에는 분명 워너메이커의 도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그는 자신의 물질을 기꺼이 드렸던 것이지요.  이것은 그가 성공한 기업인인 동시에 훌륭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리 훌륭한 상품일지라도 소비자가 알아주지 않으면 상품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상점이나 백화점을 찾는 손님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손님은 왕이요 손님은 항상 옳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존 워너메이커가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직을 제의받게 되었지요.

  “워너메이커 당신의 탁월한 능력으로 미국 체신부장관직을 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 말에 워너메이커는 조용히 거절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교회학교 교사입니다. 만약 장관을 맡음으로 인해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안 되지요."

  “워너메이커씨, 그 일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대통령은 장관직을 맡아도 워너메이커에게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장관직을 수락했습니다. 그리고 워너메이커는 매주 토요일이면 비행기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 어린이들을 가르쳤습니다. 한번은 기자들이 워너메이커에게 장관직이 교회학교 교사직만도 못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 동안 해야 할 본업입니다. 그러나 장관직은 한두 해 하다가 말 부업이지요."

  그때는 1888-1893년이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미 해리슨 행정부의 우정장관(郵政長官)을 지내며 우편전신망의 정비에 힘썼던 것입니다.




백화점이 만든 어머니날

    교회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지킵니다.  우리 나라는 이것을 어버이 주일로 발전시켜서 부모님과 어른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날로 삼고 있지요.  그러나 모든 나라는 "어머니"라는 특별한 대상을 정해 놓고 낳아 길러주신 어머니의 은혜를 감사하며 자식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사시는 어머니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본래 ‘어머니 날’은 미국의 작은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웹스터 감리교회에서 26년간 교회학교 교사로 성실하게 봉사하던 자비스라는 부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에게서 신앙교육을 받았던 학생들이 자비스 부인의 신앙과 인격을 그리워하면서 추도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시작되었지요.    이 운동을 크게 발전 시킨 사람이 바로 당시의 백화점 왕이었던 존 워너메이커였습니다.    교회학교 교장으로 충성스럽게 교회를 받들던 워너메이커는 1908년 5월 둘째 주일에 자기 백화점 주최로 ‘어머니 사랑’을 감사하는 잔치를 베풀게 했습니다.

  “‘어머니 날을 정합시다!” 

  이것을 계기로 미국의 모든 신문들이 이 운동을 환영하고 나섰습니다. 결국 1914년 미국 국회는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날"로 정했습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대통령령으로 이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워너메이커가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가장 가치있는 투자

  백화점 창립 60주년을 맞이하였을 때 워너메이커는 당시 83세였습니다. 담담히 그는 이렇게 연설을 했습니다.

  “오늘은 1921년 7월 11일입니다. 제가 3만 26일을 산 날입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든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보다 더 가치 있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태양을 보십시오! 아무리 장벽을 높게 쌓아도 태양 빛은 장벽 뒤쪽에도 비치지 않습니까? 모든 세계가 평화로왔으면 합니다.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축복 아래 번영과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여러 나라에 신앙적, 물질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지요.    워너메이커에게 어느 날 한 신문기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워너메이커 선생님! 선생님께서 지금까지 투자한 것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은 무엇인지요.󰡓

  그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내 재산은 건물과 땅만 해도 대략 2백억 달러가 넘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최고의 투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내가 열 한 살 소년이었을 때입니다. 나는 그 때 2달러 75센트를 주고 빨간 가죽 성경을 한권 샀습니다..  그것이 가장 위대한 투자였어요. 왜냐하면 그 빨간 가죽 성경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으니까요.  45년전 나는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없다고 믿었지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

  워너메이커는 꿈을 가진 소년이었습니다.    진창 속에서도 아름다운 벽돌포장도로를 본 소년이었습니다.    구름을 뚫고 무지개를 본 소년이었습니다.    워너메이커가 평생에 지녔던 표어는 3 T였다고 합니다.

  "Thinking, Trying, and Trusting in God"

  우리말로 하면 “하나님 안에서 올바르게 생각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올바르게 믿자”였지요.

  아마 워너메이커는 성경 빌립보서 4장 5-9절에 있는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이것들을 생각하라.”는 구절을 떠올렸던 듯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지요!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다릅니다. 보통 사람은 아는 것에 그치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그것을 반드시 실천합니다.’

  워너메이커는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주신 성경의 말씀대로 성공적 삶을 살았습니다.
  워너메이커는 가난한 소년시절 성경을 읽고 꿈을 키웠고,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동해 세계적인 대부호가 되었던 것입니다.



조덕영ki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