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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1-29 21:45
내가 물려받은 신앙유산(교회와 신앙/조덕영)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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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물려받은 신앙유산


 
 
 2004년 06월 09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조덕영 목사 / 전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현 안양대 겸임교수·참기쁜교회 담임


‘갈대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민족시인 신경림 시인의 갈대라는 아름다운 시의 한 구절이다. 겉으론 몸을 부대끼며 속으로 우는 갈대는 아마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리라. 그렇다! 신경림 시인의 친한 고교, 대학 후배이신 우리 형님은 내게 있어 몸으로 믿음을 살아온 분으로 보인다.

내 유년의 교회 기억은 감리교 유치원으로부터 비롯된다. 형님은 그 감리교회의 학생회 회장을 거쳐 결혼을 하셨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무심하였다. 지금까지도 형님과 내가 정확히 몇 살 차이인지 구체적으로 나이를 따져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마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너무 큰 나이 차이 때문이리라. 내가 오십을 바라보는 목사이니 형님은 은퇴가 멀지 않은 장로임을 기억할 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당시 감리교 목사님은 손피득 목사님이었다. 수년 전 90세를 훨씬 넘어 연수를 다하시고 미국 땅에서 하늘나라로 가셨다는 기사를 얼핏 본 기억이 난다.

형님은 60년 대 중반 사업하겠다고 무작정 서울행에 맨몸을 실은 자신을 충주에서 서울까지 먼 길(정말 그 당시에는 비포장도로로 아주 멀었다)을 심방 와주셨던 손 목사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계신다. 형님은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등을 거쳐 약 30년 전 순복음교회에 정착하셨다. 서민적 교회에 서민으로 살아오셨으나 실은 50-60년대 정치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정치학도였던 형님의 기반 없는 서울 사업은 그리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연이은 사업 부도와 물품 실은 차량의 예기치 못한 전복사고 등 형님이 절망 상태로 빠져든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 재기불능이 아닐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래 전 유행(?)하던 심각한 결핵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형님의 표정에서 좌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형님의 안식처는 오직 예수였다. 절망의 상황은 그대로 남겨두고 담요 하나 달랑 들고 기도원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조용히 속으로 울었다. 그리곤 또다시 오뚜기처럼 일어섰다. 형님은 신앙 연단의 노련한 체험자였다.

그러기에 취업이 지금처럼 어렵던 80년대 초반,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치기를 부리며 직장을 나왔을 때 네가 얼마나 기도하고 결정한 일이냐고 진지하게 반문하며 충고한 분도 형님이었다.

군복무 시절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불치에 가까운 병을 얻어 낯선 국군 광주통합병원에 누워 속으로 울고 있을 때 병 고침 받은 간증이 잔뜩 실린 신앙잡지를 한 자루 메고 한 밤중 부리나케 나타나신 분도 형님이었다. 형님은 이미 군목까지 찾아뵙고 나를 의탁하셨다. 형님 덕분으로 나는 병실 대항 찬송가 경연대회 키타 반주자로 나서고 매월 꼬박 500원 십일조를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1984년 내가 창조과학회 간사가 될 때 내 취업에 대해 나보다 먼저 기도 중 하나님께 응답을 받은 분도 형님이었다. 간사 사역 15년을 마치고 주의 종의 길을 가는 지금의 모든 신앙 유산이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없으나 인간적으론 형님 덕이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눈에 비친 형님의 서울 생활 40여 년은 결코 그리 순탄치 않았다. 늘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참 이상하다. 형님 친구 분들 모두 일찌기 은퇴하고 더러는 저 세상 사람이 된 분들도 꽤 있으나 형님은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하시다. 늘 허덕이며 살아온 듯한데 아직도 내 사례비보다 훨씬 많은 십일조를 하고 계시니 오히려 내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형님이 아직도 그렇게 큰 수입을 올리시는 걸까? 그렇다면 내 사례비의 십여 배 이상을 버신 단 말인가? 그렇게 버는 것은 아니었다. 장로로서 하나님 앞에 묵묵히 도리를 할 뿐이시다. 잘나가던 형님 친구들은 이제 대부분 헌금 한푼 하기 쉽지 않은 은퇴 노인들이 되었다.

그런데 늘 시련의 연속이던 형님은 아직도 원하시기만 하면 10-20년은 더 일하는 데 아무 장애가 없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동생 개척 교회의 가장 어려운 시절 물질적 도움을 주신 것도 형님이었다. 주의 종으로 되도록이면 인내와 연단의 과정도 겪고 홀로 서기를 기대하면서도 정말 어렵다고 느껴질 때 어김없이 도움을 주셨다.

1990년대 초중반 형님은 국민일보 후원회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그리고 묵묵히 감당하였다. 시간을 뺏기고 물질이 필요한 일이다. 재벌도 아니고 갑부도 아니고 사업에 바쁘신 가운데서도 기꺼이 몸으로 순종하신 것이다.

입만 살아 예수 믿는 이들이 난무하는 오늘날 몸으로 묵묵히 신앙의 길을 보여주고 계신 형님의 삶은 나를 부끄럽게 한다. 두 딸을 신학의 길로 사모의 길로 사위를 주의 종으로 섬기며 비록 세상에서는 무명의 장로로 살고 계시나 형님은 묵묵히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산다. 형님은 분명 내가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이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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