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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3-20 21:47
이신칭의의 변종, ‘의의 주입’의 사생아들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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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목사.

이신칭의의 변종, ‘의의 주입’의 사생아들


로마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 신학적 초석을 놓은 어거스틴은 개신교에 선한 영향을 많이 미쳤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많이 끼쳤습니다. 그 중 로마교의 화체설, 7성례, 연옥설을 비롯해 '이신칭의'의 변종(變種)인 '의의 주입(infusio)'교리를 창안했습니다. 이 '의의 주입'교리는 어거스틴이 '유스티피카레(Justificare)'라는 동사를 '의롭게 만들다'로 로 곡해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그는 칭의를 통해 얻는 의를 '전가된 것'이라기보다는 '내재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인간이 받는 의는 그것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안에 존재하며, 따라서 그의 것 곧 그의 존재의 일부이며, 인격에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John MacArthur).


이 어거스틴의 칭의론에 기초한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 1545- 1563년)의 '의의 주입(infusio)' 교리는, 혈관에 주사된 주사액이 핏줄을 타고 들어와 몸속에 내재되듯, 주입된 의가 몸속에 내재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은총이 인간의 마음 속에 주입됨으로서 신자에게 의가 내재케 되었고(곧 신자 자신의 의가 됨), 이 내재케 된 의가 죄인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근거이며, 이 의는 성화와 연옥(purgatory)을 통해 완전해져야 한다."



여기서는 '의의 주입' 자체는 논외로 하고, '의의 주입(infusio)' 교리가 낳은 사생아들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그 첫째가 '도덕주의 기독교'입니다. 이는 의가 사람 속에 주입되면 그것이 그의 속성이 되어, 반드시 그의 도덕성으로 표출된다고 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는 칭의받지 못한 것으로 규정됩니다. 이들에게 도덕은 칭의받은 자의 본질적 요소이고, 칭의 여부를 가늠하는 절대적 잣대가 됩니다. 이러한 도덕주의 개념은 칭의를 넘어 중생까지도 "외형적인 행동의 변화"로 왜곡시켰습니다.


반면 '의의 전가(imputatio)'를 주장하는 개혁주의는 그 의(義)가 자기 의가 아니기에, 도덕적 의로서 칭의를 증거할 수 없다고 봅니다. 청교도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 소요리문답 해설서는 '칭의'의 증명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칭의와 같은 것, 바로 이러한 것은 행위로는 증명될 수 없다. 칭의는 믿음 이외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증명될 수 없고 때문에 결국 그것은 믿음으로라야만 된다."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본래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거니와, 전가받은 후에도 여전히 자기 것이 아닌, 다만 옷 입듯 의를 입는 것입니다. 이런 칭의의 특성을 루터는 "우리 밖의(extra nos)" 의(義)라고 했으며, 개혁주의 신학의 객관주의 원리를 제공합니다. 명저 <칼빈(John Calvin)>의 저자 프랑소와 방델(F. Wendel)은 칼빈의 말을 빌어, 칭의의 선언이 하나님 앞에서는 법적으로 완전한 의로 인정받지만, 인간 스스로는 여전히 의롭지 못하며 소극적 의미의, 겨우 죄를 인식하는 것을 주목할 정도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라는 이러한 교리로부터 논리적으로 얻게 되는 결론은, 죄 사함 받은 후라도 결코 우리는 실제로 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칭의를 수반하고 있는 성화, 아니면 적어도 칭의와 함께 시작하는 성화로 인하여 우리가 더욱 더 분명히 우리의 죄를 인식할 수 있음을 주목하는 것이다."


특히 칭의가 '법적인 선언'에 방점을 둔다는 점에서 도덕주의 기독교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만일 그가 이미 속속들이 완전히 의롭게 됐다면 일부러 법적 선언을 하면서까지 의롭다고 인정해 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하게 의로운데 굳이 그에게 의롭다는 법적 선언을 해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죄가 있음에도 의롭다고 인정해주려고 하니 법적 선언이 필요한 것입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가 "전가(imputatio)의 개념은 법정적인 칭의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 것은 탁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루터의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다(simul justus et peccator)"가, 도덕폐기론자들에게 계속 죄인으로 남게 하는 빌미가 아닌, 죄인이 의인되려는 투쟁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것처럼, '의의 전가'가 비록 우리 안에 의를 내재시키지는 못하지만, 의롭게 되려는 투쟁을 시작하게 합니다.


'의의 주입(infusio)' 교리가 낳은 또 하나의 사생아가 신비주의입니다. 주입된 의(injected righteousnees)가 외면의 도덕성 표출로 나타나는 것에 도덕주의가 주목했다면, 신비주의는 주입된 의가 내면의 신비 체험으로 나타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 생명의 본질이기에, 의(義)가 사람 안에 주입되면 의로부터 나오는 속성들인 하나님의 신성, 생명 등이 그 사람에게 체험되고, 그 체험이 그로 하여금 내면지향적인, 신비주의 영성으로 흐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자기 안에 주입된 신의 본성에의 참여, 곧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과는 다름)이 그의 지상 목표가 되며, 그 목표에 다다르는 것을 구원으로 봅니다. 이러한 합일의 과정에서-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구현인-성찬(transubstantiation, 화체)이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돕는 매개체로 등장합니다.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으로 하여금 평생 신비주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던 요인이, 회심 후에까지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와 '의의 주입'교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의 대표적인 명저, 고백록(Confessiones)에 하나님과의 합일을 탐닉하는 신비주의적인 내용들이 풍부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의의 주입을 믿는 로마천주교가 신비주의로 흐르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입니다.


'의의 주입(infusio)' 신학으로 생겨난 또 하나의 사생아가 신인협력론(synergism)입니다. 죄인에게 없었던 하나님의 의가 그에게 주입될 때, 그 의를 유지 확장하고 완성하기 위해 그에게 현재적으로 감당해야 할 노력이 요구되는데, 이 노력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성화입니다.


이는 개혁주의가 성화를 칭의 받은 자 답게 되려는 투쟁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개념으로서, 칭의를 완성하는 필수 조건이 됩니다. 그리고 생전에 성화적 노력으로 제거되지 못한 죄, 오염은 연옥(purgatory)에서의 담금질로 제거되어 칭의가 완성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의의 주입(infusio)' 교리가 신인협력 교리로 흐르게 한 가장 큰 요인은, 주입된 하나님의 의가 인간 안에 내재될 때 인간 수준의 불완전한 의로 전락되어, 인간 협력이 필요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인간을 하나님 의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주입되는 순간-인간이 하나님의 의로 승격되는 것이 아니라-도리어 하나님의 의가 인간 수준의 의로 전락돼, '성화'와 '연옥(purgatory)'으로 칭의를 완성해야 할 필요가 생깁니다.


이는 저급한 물질인 빵과 포도주가 사람 몸 안에 들어가 예수님의 살과 피로 승격되는 화체설과는 정반대 원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주입될 때 입게 되는 의의 손상, 곧 인간수준의 불완전한 의(義)로의 전락은, 사람이 어떤 가상한 노력을 기우린다 해도 완전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게 합니다. 다음의 지적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되지 않고서는 설사 우리에게 '주입'된 모든 은혜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중생의 은혜와 성령의 내주하심과 그 능력을 받은 신자들도 여전히 죄를 짓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성례전을(48) 통해 은혜를 받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가 요구하는 거룩함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내재하는 그 어떤 의보다 더 큰 의, 다시 말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 어떤 수단이나 은총보다 더 큰 의를 필요로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그 의가 '우리 밖에(extra nos)' 있는 의라는 사실을 그토록 주장했던 것이다. 이 의는 우리 '밖에' 또는 우리와 '무관한' 의, 곧 우리에게 전가된 의다. 이 의는 '다른 의(justitia alienum)' 곧 우리를 대신한 다른 사람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의다(John MacArthur)."


물론 로마 가톨릭은 인간 안에 주입된 의(injected righteousnees)가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라고 주장하면서,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논지를 펴므로 스스로 모순을 드러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주입되므로써 일어나고, 또 신자가 그 은총에 동의하고 협력할 때(assentire et cooperare)만 의롭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인간 협력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이미 완전한 의가 아니며, 또한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 역시 주입된 의가 완전한 하나님의 의가 아님을 천명하는 것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습니다.


'의의 주입(imputatio)'과는 달리 '의의 전가(infusio)'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 차원의 의로 전락시키거나 손상하는 일 없이 그대로 보존하기에, 인간의 어떤 협력도 불필요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밖의 그리스도의 은혜를 주목하게 하므로, 신비주의 같은 주관주의에서도 우리를 건져냅니다.


'의의 주입(imputatio)'교리와 관련하여 생겨난 또 하나의 사생아가 주후 2세기의 영지주의(Gnosticism)인데, 플라톤주의(Platonism)의 이원론(dualism)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개념과 맞물려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주입되듯이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된 인간 육체에 들어오시면, 하나님 속성이 손상을 입어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는 성육신이란 불가능하며, 초대교회가 육체를 입은 하나님으로 믿었던 예수는 진짜 인간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띤 환영(幻影)이어야만 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의가 인간 안에 주입(infusio)되지 않아 하나님 의가 그대로 보존되는 '의의 전가(imputatio)' 교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어도 그의 신성이 손상되지 않는 성육신 교리를 믿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게 합니다.


그리고 노파심에 덧붙여, 신인협력 교리는 다만 '의의 주입(infusio)'을 믿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의의 전가(imputatio)'를 믿는 건전한 복음주의자들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음을 환기시키고자 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의만으로는 칭의에 부족하다거나, 칭의에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칭의를 십자가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에만 전적 의존시키기보다, 현재 성도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역할과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 의존시킵니다.


그 결과 칭의를 이루기 위한 성령의 현재적, 내적 역사에 반응하는 인간의 협력이 필수불가결해지고, 부지불식간에 신인협력주의에 연루되며 칭의는 현재진행형의 미완성품으로 전락됩니다. 다음의 뷰캐년(James Buchanan)의 지적도 같은 관점입니다.


"그가 아직 세상에 계시기도 전에 오직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과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일에 근거하여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미 종결되어진 사역에 근거해서 완전한 확신 가운데 안식하며, 성취되어진 의에 기초해서 안식할 수 있다. ... 이에 반해 우리가 만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근거해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종결되어지고 용인되어진 것이 아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