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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1-02 11:28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의 반대에 대한 고찰(조덕영)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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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의 반대에 대한 고찰(조덕영)





1.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의미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란 예수의 동정녀에 의한 수태(受胎) 즉 성적 접촉이 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수태되었다는 믿음을 말한다. 이 동정녀 탄생은 모든 정통 기독교의 신앙고백들에 공통된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는 이 부분을 확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녀 탄생의 교리에 대한 반대 또한 계속되어 왔다. 더욱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등장하면서 이 조항은 갈수록 의문시되고 있다. 이것은 주로 성경이 지닌 표준의 지위를 부정하고 때로는 기적의 가능성을 주정한 데서 귀결된 결과였다.

여기서는 그 반대 교리에 대한 주장들을 간단히 살펴보고 비판적으로 고찰 해보고자 하였다.



2.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초대 교회 전승과 반대

1)사도 신경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으셨음을 고백하는 오늘날 사도 신경의 형태는 5-6세기 경의 고울(Gaul)지방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그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제로 사도 신경은 로마의 세례 고백에 근거한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사도신경의 후기 본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초기 형태에서도 드러난다. 사도신경의 초기 형태는 이미 2세가 중반을 넘어 전 로마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북 아프리카의 터툴리안(Tertullian, 약 196-212년 경)과 고울과 소아시아 지방의 이레네우스(Irenaeus, 약 130-200년 경)에 의해서도 사용되었다. 로마 중요 교회들의 초기 고백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가 출현했다는 것은 신경이 다른 새로운 교리와 섞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2)동정녀 탄생에 대한 반대
기독교 초기(주후 2 세기)에 나타난 강력한 증거는 동정녀 탄생의 역사성과 사실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모두 다 동정녀 탄생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초기에도 반대가 있었다.

이교도들의 반대도 있었으나 주로 유대인들이 동정녀 탄생에 대해 반대에 나섰다. 이들은 좀 더 정확하게 예수 관련 전승을 그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파급효과는 만만치가 않았다. 그 가운데는 켈수스(Celsus)와 케린투스(Cerinthus), 카포크라테스(Carpocrates) 그리고 초대 교회 시대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던 에비온파(The Ebionites) 등이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였다.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이 문제에 대해 2세기 이후 부정적 증거들은 순수하게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아마도 철학적이거나 교리적 전체에 더욱 치중한 것으로 보았다.

현대로 오면서 동정녀 탄생 기사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더 광범위하다. 예를 들어서 폰 캄펜하우젠(H. von Campenhausen)은 마태의 족보가 그 자신의 동정녀 탄생 제시와 일관성을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H. von Campenhausen, The Virgin Birth in the Theology of the Ancient Church, E.T., 1964, 10ff.). 그런가 하면 테일러는 Proto-Luke 가정에 근거해서 누가 복음 1, 2장은 본래의 복음서에 속하지 않는 후대의 삽입 부분으로 보는 입장을 취한다(Vincent Taylor, Behind the Third Gospel [1926], 164ff.). 로빈슨(J. A. T. Robinson)은 동정녀 탄생 교리가 예수를 우리와 달리 참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스트라우스(D. F. Strauss, 1808-74)는 역사적 기독교를 부정하면서 신앙적 기적과 초자연을 모두에 대해서도 당연히 인정하지 않는다. 동정녀 탄생은 스트라우스에게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신화였다. 케어드는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이야기가 희랍 세계에 전달되었을 때 일어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G. B. Caird, Luke [1968], 31). 성경 본문의 비신화화를 주장한 루돌프 불트만도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유대적 맥락에서가 아니라 헬레니즘적 맥락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했다(R.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291ff.). 그의 제자인 콘첼만은 이를 다신론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교에서의 신현과 성육신 이야기들을 언급하고 있다(Conzel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78).



3.동정녀 탄생에 대한 교리는 왜 중요한가

많은 사람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만일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의 평범한 아들로 태어났다면 그도 아담의 죄인의 후손일 뿐이며, 그 자신이 죄인이므로 자신 뿐 아니라 죄인을 구원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워필드(B. B. Warfield)는 초자연적 그리스도와 구원이 초자연적 출생의 필연적 결과를 수반한다고 하였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주는 반드시 하나님과 죄 없는 인간의 인격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동정녀 수태 교리는 정통 기독론의 중요한 골격 중 하나였다.

종종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을 성육신과 혼동한다. 성육신은 삼위일체의 2위이신 영원하신 성자가 인간이 되셨다고 진술한다. 동정녀 탄생 교리는 이 참인간이신 예수께서 인간 아버지를 두시지 않았음을 말한다.  게할더스 보스는 성육신을, "선재하시는 메시아가 인간성(human nature) 안에 들어오시며, 초역사적인 분이 역사의 흐름 속으로 들어오시는" 놀라운 사건으로 보았다.

동정녀 탄생이 그 자체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나 예수는 이처럼 이 세상과 역사 가운데로 오실 때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들 가운데 오셨다. 이것은 인간의 의도와 생각의 영역을 벗어나는 사건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의 인성(human nature)을 취할 때 그는 성령에 의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방식을 취하셨다. 따라서 그녀의 몸 안에서 다른  태아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10달 동안 자라 태어나신 것이다. 

성육신의 사실은 우리의 성찰에 앞서 이미 있다. 에밀 브루너는 동정녀 탄생기사를 성육신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시도라고 해석한다. 브루너는 성육신 교리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동정녀 탄생 교리는 거부한다. 그는 예수가 만약 아버지 없이 태어났다고 한다면 그는 완전한 인성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 가운데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육신 하도록 하셨는가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 생각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고찰과 성찰에 따라서 이 사건이 바뀌거나 그 의미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 계시와 자연 신학에 호감을 가진 브루너와 달리 자연신학에 부정적인 칼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 교리를 성육신 교리와 연관시킨다.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 교리 속에서 성육신의 표징을 보았다. 바르트는 이사야 7장 14절을 아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는 동정녀 탄생에서 상징화되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모든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태도는 우리 시대와 같이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고 저버리는 시대에 아주 필수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4.그리스도 동정녀 탄생의 반대에 대한 비판적 고찰

1)동정녀 탄생이 신약의 겨우 두 단락에서만 진술된다는 문제
동정녀 탄생은 신약성경의 두 단락에서 명백하게 진술되고 있다(참조 마 1:18-25, 눅 1:26-38). 그리고 동정녀 탄생이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으나 다른 단락에서도 가끔 인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이를테면 막 6:3, 요 1:13, 갈 4:4). 신약성경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언급이 부족하다는 이유가 때로 이 교리의 부족한 역사성을 말한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신약성경의 두 유아기 기사에 공통되는 부분이 동정녀 탄생 기사뿐이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기사가 초기의 공동 전승을 기초로 삼았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또한 마태복음 1:23의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이사야 7:14을 인용하고 있음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예언의 배경은 유대왕 아하스가 하나님을 떠나 앗수르의 이방 왕에게 도움을 구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를 꾸짖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표적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이었다.

여기서 처녀라는 말은 히브리어어 알마(המלע)의 번역인데 구약 헬라어 번역인 70인역(LⅩⅩ)에서 팔데노스(παρθὲνος)로 번역하였다.그 말은 처녀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알마는 처녀를 가리키기보다 젊은 여성 혹은 결혼 적령기의 여성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여성을 가리킨다.

오히려 처녀는 히브리어 베투라(ה󰗚וּת󰔶)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마리아는 처녀가 아니요 예수님이 꼭 동정녀 탄생을 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알마라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과 처녀는 기능상에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처녀 마리아를 얼마로 표현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이 경우에 마리아는 젊은 여성으로 쳐녀였다. 그것은 누가복음 1:34에서 마리아는 천사가 그녀에게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고 했을 때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요”라고 하여 자신이 처녀인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또 잔(Zahn)은 제롬(Jerome) 시대 이래로 구약의 모든 알마(המלע)가 나오는 구절은 항상 처녀(virgin)로 사용해 왔다고 하였다. 더구나 70인 역이나 마태는 젊은 여인이 자연적인 방법으로 잉태하리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 처녀는 미가 5:3에 언급된 특수한 처녀를 가리켰다.

우리들이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을 성경에 단 한번 소개되었다고 이 표적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동정녀 탄생은 분명 마리아의 예수 수태가 기적이었음과 인간 아버지를 두지 않으셨음을 알리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 옳다.

2)동정녀 탄생이 완전한 인성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견해
예수의 부모 중 한 사람만 인간이라면 예수가 완전한 인성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몇 사람에 의하여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성의 본질과 그것이 한 세대에 다른 세대에 대해 혼동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간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완전한 인간이었고 특히 아담의 경우를 보면 어떤 의미든 간에 그에게 인성을 전해준 사람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성 인자가 없어서 완전한 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의견은 무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의견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실제 그런 일이 뒤따르지도 않았다, 예수는 마리아의 유전인자만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게 태어났다고 하면 예수는 마리아에 의한 무성 생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며 필연적으로 여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남성 인자로 구성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의 정자가 마리아의 난자와 결합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실존하는 남성에 의해 제공된 정자가 아니라 이 경우를 위해 특별히 생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동정녀 탄생이 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조화될 수 없다는 견해
동정녀 탄생을 반대하는 중요한 견해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관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부인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이며 결코 보완적이지 않다. 이런 점에서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nberg)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부정적인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그의 선재론은 신성과 관련된다. 동정녀 탄생은 그의 인성과 관계된다., 삼위 중 제 2위로서의 말씀은 언제나 계셨다. 그런데 한 유한한 시간 속에 인성을 입으시고 인간으로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가 있었다. 예수의 지상에서의 생애가 시작부터 순수한 성육신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선재론과 동정녀 탄생이 모순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

4)동정녀 탄생이 자연법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인간의 생물학적 지식과 인간 출생에 관한 지식에 상반된다는 근거 하에 거부되어 왔다.  우리가 지금 기적과 초자연이 받아들어지지 않는 인간 역사의 연대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비평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자연의 일관성 혹은 규칙성을 부인하여 과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반대하고 있다.

기독교 신학은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강력한 후원자였다.. 이적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어거스틴은 교부시대로 웅변적으로 되돌아가, 자연은 그 나름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이적은 언제라도 검출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자연을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혹은 예측할 수 없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파괴적인 일이다. 자연의 일관성, 혹은 통일성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와 과학간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동정녀 탄생의 문제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철학, 혹은 세계관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적 구조에서 바라볼 때 동정녀 탄생은 구속이라고 하는 위대한 초자연적 구도 가운데 일부이다. 자신의 과학을 믿는 복음주의자들은 신적 계시라고 하는 고차원적 근거 위에서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세상 구속을 믿는다. 만일 동정녀 탄생이 이 세대의 위대하고 장대한 드라마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면, 그 교리는 지나간 민족 설화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만 아이가 생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말해지고 있는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부적절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평가하기 어려운 말이다. 분명히 신조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고백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언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격을 고백하고 있다. 처녀로부터 탄생하는 것과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처녀의 몸으로부터 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참 인간이셨음을 “하나님께서 아셨다”는 사실은, 역사신학에서 하나의 무언의 전제임이 분명하다. 우리들의 의견으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신조들이 그의 인격과 그 진정성을 또한 확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다고 보여진다.

더욱이 현대의 심리학적 연구와 유전학적 연구결과에 따라, 우리가 인간을 만드는데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교리화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관하여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증식된 개구리가 그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개구리의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인간이 인간의 인간됨의 뜻과 인간의 유전학에 관한 보다 많은 지식을 갖기까지는 위의 반대의견은 마땅히 중지되어야 할 것이다.


5)동정녀 탄생은 지엽적 문제가 아닌가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 지엽적인 문제라는 주장이 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신약 성경 어디에서도 이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동정녀 탄생 교리에 대한 증거들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은 인정된다. 또 동정녀 탄생 이야기가 결코 신약성경 본문들 가운데 기록된 “복음” 혹은 케리그마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된다. 그러나 중요한 신학적 내용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를 평가절하 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비평적, 혹은 신학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야만 한다. 더욱이,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이 동정녀 탄생에 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말할 때, 또 다른 기준이 그 주장에 개재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 다른 기준이라는 것은, 동정녀 탄생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설사 알려졌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기준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침묵으로부터의 주장이라고 하는 개념을 만나게 된다. 논리적으로 볼 때 이 논법은 근거가 불확실한 것이다. 우리가 의문을 던지고자 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나머지 부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이외의 부분)이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이라는 논법이 논리적인 면에서 불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D. Edwards)는 동정녀 탄생과 주님의 마지막 만찬을 흥미 있게 비교하고 있다. 주님의 만찬보다는 동정녀 탄생에 관한 특정한 자료가 더욱 많다. 만일 어떤 사실의 중요성을 그에 관해 기록한 본문의 구절 수로 판단할 수 있다면, 그래서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그처럼 평가절하 한다면, 주님의 만찬에 관한 이야기도 그만큼 평가절하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금까지 어느 누가 절수를 세는 방법으로 주님의 만찬에 관한 신학적 중요성을 계산해낸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어떤 주어진 개념이 그에 관한 성경의 증언 가운데 제아무리 물량적으로 풍부하더라고, 그것을 신학체계 속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신학자는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것에 관한 아주 광범위한 논의가 구약성경 가운데 존재한다. 어떤 개념의 중요성을 매기는 것은 그 개념 자체에 의해서 이며, 따라서 역사적 기독론의 방법론에서 볼 때 동정녀 탄생 교리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6)타종교 전설과의 유사성
성경에 기록된 동정녀 탄생 기사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제안이 있다. 즉 다른 종교적 문헌들 속에 나타나는 유사한 기록들을 적용시켰다고 보는 견해이다.  플루타르크(Plutarch)는 한 여인이 신적 영(Pneuma)에 접했을 때 임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누마(Numa)의 전설에 관해서 말하면서 누마는 자신에 아내가 죽은 후 신적 존재인 에게리아(Egeria)와 관계를 맺기위해 고독 속으로 들어갔다는 전설상에 인물이다. 제우스가 어떻게 헤라클레스와 페르세우스 그리고 알렉산더를 낳았으며 아폴로가 어떻게 이온과 아스클레피우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를 낳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동정녀 탄생을 신화나 전설로 보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신화 속에 나타난 탄생 이야기는 동정녀가 아닌 단지 신과 인간 사이의 간음에 불과하다. 성경 속의 동정녀 탄생은 전적으로 다르다. 무디(Dale Moody)는 이교도들의 다신교적인 성적 문란 신화와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고상한 일신론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넓어서 아무리 조심스럽게 연구해도 그 틈새를 메꿀 수 없다고 하였다. 즉 둘 사이에 유사성은 적고 차이점은 크다. 그러므로 이방신화들이 복음서에 섞여들어 왔을 거라는 생각은 맞지 않다. 이와는 다르게 성경 기사를 이방종교 대신 유대교와 관련해서 보는 사람이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유대적 색채가 매우 강함으로 직접적인 이방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없다.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기대가 담겨져 있다고 본다. 유대교가 이방 종교로부터 나온 생각을 어느 정도 따와서 채용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적 특성을 띠고 기독교에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문제는 유대교가 실질적으로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었다는 설명이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동정녀 탄생은 사실 이교도의 생각이며, 그 생각이 기독교에 직접적으로 수용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유대교로 흘러들어 갔다가 점차 기독교에서 이를 수용했다고 하는 가정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유대교 속에 동정녀 탄생에 관한 믿음이 들어가 있었음에 분명하다고 가정한다.




5.나가면서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에 대해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제 36문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수태와 탄생으로부터 당신은 어떤 유익을 얻습니까?" 라고 묻고, 이에 대해서 요리 문답은 "그가 우리의 중보자이시라는 것과 그의 순수하심과 온전한 거룩하심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타고난 (내가 그 안에서 난) 나의 죄를 덮으시는 유익을 얻습니다"고 대답하고 있다. . 영원하신 성자는 성령으로 우리의 인간성을 무흠하게 취하셨기에 그는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에 가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었다.

동정녀 탄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볼 때에 유한한 인간은 늘 인간의 눈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의심과 시비를 걸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모든 성경의 사실과 마찬가지로 신비한 동정녀 탄생 교리에 있어서도 풀리지 않은 부분이 존재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기록은 여전히 신적 권위 아래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